한국 명산산행기

정기산행 (계룡산,845m) [시산제]

Sanmoo 2011. 3. 7. 12:22

 

 

 

◆ 장    소 : 정기산행 (계룡산,845m)  [시산제]
◆ 산행일자 : 2011년 3월 6일 (일요일),  날씨:  맑음, 9℃
◆ 누 구 와 :사계절님,도전님,꾸러기님,민들레님,김남훈님+5명,동행님,보리님,단팥님,파워님,옥친구님,달구지님,꽃향기님.심효순님.노동조님,심마니님+2명,안개님,헤르님,산에는님,왕언니님,천불동님,보라짱님,돌쇠님,소나무님,후미일번지님, 나무님,봉우재님,간다님,솔바람님,용장군님.산울림님+1명.김권수님.김우봉님,아로운님,산무 (42명)
◆ 산행코스: 동학사 대형주차장→천정골→남매탑→삼불봉→자연성릉→관음봉→문필봉→연천봉 삼거리→갑사 주차장  (산행거리 약 9.6km,산행시간 약 4시간)

 

새오름산악회 2011년 시산제하는 날이다. 무엇보다 시산제 장소로 계룡산으로 택한 운영진의 탁월한 선택에 감사를 먼저 드리고 싶다.  우리 뿐만아니라 타 산악회에서도 오늘 이곳에서 시산제를 지내는 것을 보아 일년간 무사 안녕을 비는 시산제로 적합한 장소로 이만한 곳은 없다고 생각이 든다.    계룡산 하면 누구나 생각이 나는 수필이 있다. 그래서  이번 산행기는 이상보님의 [갑사로 가는 길]의 수필의 내용 형식을 빌어 쓰고 싶다.  한겨울 토요일 오후에 갑사로 가신 이상보님의 길을 우리는 시산제 이후 삼월초 일요일 오전 갑사로 발길을 옮긴다.  이곳은  학창시절에 학우들과 함께 갑사에 왔던 기억이 있는 장소이며,계룡산은 나에게는 마음의 산이기도 한 장소이며 그때 '갑사로 가는 길"의 내용대로 그대로 가고 싶었으나 당시에는 가보지 못했고, 2007년 4월경에 한번 아내와 함께 동학사 초입에서 남매탑 지나 갑사로 내려온 기억이 나는 곳이다.    학창시절 이상보님의 "갑사로 가는길" 이라는 수필이 교과서에 실려 그당시 학생 이었다면 한번쯤은 읽어 보았을 겁니다.  우리도 이상보(李相寶)님의 수필에서와 같이 동학사에서 남매탑의 전설을 들으며 갑사로 넘어가는 계룡산 능선을 따라 걷는 코스이다.   그 내용은 어렴풋이 생각이나 다시 서가에 있는 이상보님의 수필을 꺼내 읽어본다. 수필 마지막에  "시나브로 어두워지려 하고 땀도 가신지 오래여서,산허리를 타고 갑사로 내려가는 길에,눈은 한결같이 내리고 있다" 라는 문장에 " 시나브로 "란 아름다운 우리 말이 생가나게 하는 순간이다.  이 글의  작가는 눈 내리는 한 겨울 동학사에서 거슬러 올라 남매탑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갑사로 발길을 돌려 내려 갔다.  남매탑(男妹塔)의 전설의 내용 인즉 " 옛날 이 곳에 한 스님이 기도하던 작은 암자가 있었다. 하루는 한밤중에 범이 찾아와 으르렁거렸다. 스님이 자세히 보니 범의 목에 인골이 걸려 있었다. 스님이 범의 목구멍에 손을 넣어 걸려 있는 人骨를 빼주었다. 그러자 범은 이내 사라졌다.
그 이튿날 범이 다시 나타나 스님을 등에 태우고 산 속으로 들어갔다. 범이 숲 속에 스님을 내려놓는데 그 곳에는 기절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스님은 여자를 암자에 데리고 와 치료를 하였다. 깨어난 여인이, “혼인을 하루 앞두고 뒷간에 갔다가 잡혀왔다.”고 하자, 스님은, “날이 밝으면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여인은 범에게 잡혀온 자신이 죽지 않고 암자에 머물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더군다나 스님과의 인연은 부처님이 만들어준 인연인 것 같았다. 그래서 스님이 귀향할 것을 권해도 끝내 가지 않고, “스님과 함께 불도를 닦겠다.”고 결심하였다. 결국 두 사람은 오뉘의 연을 맺고 일생을 더불어 이 암자에서 수행하였다. 뒷날 사람들은 이 두 오뉘의 인연을 기려 탑을 세우고, 탑의 이름을 남매탑 또는 오뉘탑이라고 불렀다."

* 참고 : http://www.supil.com/essaylove/essay100/supil57.htm
시간을 만들어서 상기 홈페이지 접속하여 이상보님의 [갑사로 가는 길] 의 수필을 꼭 읽어 보시 길 바랍니다.
 
남매탑을 지나 삼불봉(775m) 정상을 향해 가파른 철 계단을 따라 올랐다. 정상에 오르니 조망이 앞권이다.  계룡산이 전체 산줄기가 훤히 보였다. 주봉인 천황봉(845m)을 비롯, 쌀개봉(828m) 관음봉(616m) 연천봉(740m) 등 봉우리들이 가파른 능선으로 이어졌다.
삼불봉과 관음봉을 잇는 자연성릉의 암릉 줄기는 꼭 용의 등뼈를 빼닮았다. 양 옆은 천길 벼랑. 그 아득함이 능선의 아름다움을 배가시켰다.
계룡산(鷄龍山)은 충남 공주시에 주로 위치하면서 일부가 논산시와 대전광역시에 걸쳐 있는 산으로서 산세가 마치 " 닭의 벼슬을 쓴 용의 모습" 과 같다 하여 계룡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고 있으나 계룡이란  정확하게 조선 초 무학대사가 이 산세를 보고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이요, 비룡승천(飛龍昇天)형이라'해서 붙여진 이름인 것을 알았으면 한다. 
오늘 산길은 이상보님의 수필을 다시 음미하며 "갑사로 가는 길" 의 마지막 종착점이 갑사에 다달아 서야  수필의 내용을 이해 할 수 가 있다.

 

* 참고사항 *
東鶴寺 상봉 북동쪽 골짜기에 위치한 이 절은 724년(신라 성덕왕 23) 상원조사(上願祖師)가 조그만 암자를 지어 수도하였으며 그가 입적한 후 724년(신라 성덕왕 23) 상원조사의 제자인 회의(懷義)화상이 쌍탑을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며 도량을 짓고 이름을 청량사(淸凉寺)라 하였다. 고려시대인 920년 도선국사가 사찰을 중창하였고 국사가 원당을 건립하여 국운융창을 기원하였다고 하여 태조의 원당이라고 불리웠다.  937년(고려 태조 20) 신라가 망하자 대승관(大承官) 유차달(柳車達)이 이 절에 와서 신라의 시조(始祖)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초혼제(招魂祭)를 지낼 때, 동계사(東鷄祠)를 건축하니 참선승려들이 운집하여 사찰이 커지게 되었고 후에 동학사로 고쳤다고 한다.

1394년 조선시대(태조 3)에 들어와 고려의 충신 길재(吉再)가 동학사의 승려 운선과 함께 공민왕 등 고려의 왕족과 정몽주(鄭夢周)의 제사를 지냈으며 1457년 김시습(金時習)이 단종과 안평대군, 김종서(金宗瑞) ·사육신(死六臣)의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1728년(영조 4) 신천영(申天永)의 난 때 소실된 것을 1814년(순조 14)에 월인(月印)이 예조(禮曹)에 소(疏)를 올려 10여 칸을 중건하고, 1824년에는 홍희익(洪羲翼)이 별채를 짓고 인신(印信)을 봉안하였는데, 1864년(고종 원년)에 보선국사(普善國師)가 모두 헐고 절 40칸, 초혼각 2칸을 중건하였다. 6 ·25전쟁 때 거의 파괴된 것을 1975년 개축하였다.

현재는 비구니 사찰로, 계룡산국립공원구역이다. 경내에는 고종이 사액(賜額)하였다는 숙모전(肅慕殿)과 동계사(東鷄祠) ·표충사(表忠祠) ·삼은각(三隱閣) 등이 있으며 암자는 관음암, 길상암, 문수암, 미타암, 귀명암, 상원암이 있다.

계룡사·계룡갑사·갑사(岬寺)·갑사사(甲士寺)라고도 한다. 420년(백제 구이신왕 1) 고구려에서 온 승려 아도(阿道)가 창건하였다.
505년(무령왕 5) 천불전(千佛般)을 중창하고 556년(위덕왕 3) 혜명(惠明)이 천불전·보광명전·대광명전을 중건하였다. 679년(문무왕 19) 의상(義湘)이 당우(堂宇) 1,000여 칸을 더 지어, 화엄도량(華嚴道場)으로 삼아 신라 화엄십찰(十刹)의 하나가 되었고, 옛 이름인 계룡갑사를 갑사로 개칭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모두 소실되어 1654년(효종 5) 사정(思淨)·신휘(愼徽) 등이 크게 중창하였고, 1875년(고종 12) 다시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강당·대적전(大寂殿)·천불전·응향각·진해당(振海堂)·적묵당(寂默堂)·팔상전·표충원·삼성각·종각 등이 있다. 또, 보물 제256호인 철당간 및 지주와 제257호인 부도(浮屠)가 있으며, 《석보상절(釋譜詳節)》의 목각판이 있고, 1584년(선조 17)에 만든 범종, 경종이 하사한 보련(寶輦), 10폭의 병풍, 1650년(효종 1)에 만든 16괘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