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안산(楚安山-114.1m)
◆ 장 소 : 초안산(楚安山-114.1m)
◆ 산행일자 : 2009년 8월 30일(일요일), 날씨: 오전에 가랑비 흐리다 오후에 맑음
◆ 누 구 와 : 아내와 함께
◆ 산행코스 : 녹천역1번 출구로 나와서 왼쪽에서 시작 한바퀴
번개산행 약속이 되어있는데 늦잠 자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다. 부랴부랴 문자로 미안함을 전하고 다시 잠을 청한다. 어제 금북정맥 3구간을 갔다오고 약간의 약주를 했더니 몸이 천근만근이다. 모처럼만에 일요일 오전에 달콤한 휴식을 취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아내와 함께 집앞에 있는 초안산에 올랐다. 바로 집 앞에 있어도 자주는 가지 못하지만 오늘은 일부러 회원들에게 초안산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갔다왔습니다.
초안산은 서울시 도봉구 창동 산202-1 과 노원구 월계동 산8-3 에 걸쳐있는 아주 작은 산이다. 하지만 이산이 '초안산조선시대분묘군'으로 사적 44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산 전체에 석물(石物)들이 약 1000여기가 산재되어있다. 이것들이 15세기 이래 서민, 중인, 내관, 상궁,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각종 문관석(文官石)·상석(床石)과 동자상 등이 시기별로 분포되어 있어 조선시대 묘제와 돌조각의 변천사연구에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으나 아쉽게도 보존이 잘되어 있질 않아 보기 흉하게 산재되어있다. 특히 내시의 후손들은 자신의 조상이 내시라는 것을 숨기려고 했기 때문에 내시들의 무덤이 없어지거나 훼손된 상태로 현재에 이르렀으며 직접 목격했듯이 여기저기 수풀과 바위사이에 석물들이 흩어져 있는 상태이다. 지금은 그 공동묘지앞에 멋지게 안내문을 설치해 놓아 4개 국어로 설명 해놓았다. 조선시대 궁궐 안에서 잡무를 보고 임금의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관직이며 왕명전달들을 주로하는 내시부(內侍府)의 관원인 內侍(내관)의 분묘가 많은데 그 중에는 17세기 초부터 내관을 지낸 김계한과 그의 아들 김광택의 무덤이 이곳에 있었으며 현재는 양주 효촌리로 옮겼다, 승정원일기’ 등을 확인한 결과, 초안산 자락인 매봉산 정상 녹천정 아래 위치한 내시부 승극철 묘비는 조선시대인 갑술년(1634년·인조 12)’이 아니라, 실제는 1634년보다 60년 뒤인 1694년‘숭정(崇禎·중국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연호) 기원후 재갑술년(1694년·숙종 20)’ 또는 그 이후일 것이란 사실도 밝혀졌으며 내관 김계한의 손자 승극철(承克哲)의 부부묘와 비석이 지금도 남아 있어 내관의 생활사 연구에 자료가 되었으며 이산을 "內侍山"이라고도 부르는 이유이며 내시들의 공동묘지이다.
이곳에 있는 내시들의 묘들은 대부분 궁궐이 있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이것은 초안산의 지형적 특성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지만 죽어서도 궁궐을 바라보며 왕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까지도 마을 사람들이 매년 가을 이곳에서 내시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이왕 내시이야기를 꺼냈으니 잘려나간 성기와 고환을 조선시대는 어떻게 했을까?
" 내시의 절단한 양물을 고승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주인인 내시보다 높다는 뜻이다. 수술후 절단된 남근은 썩는 것을 예방하고, 피와 수분을 제거하기 위해 횟가루가 담긴 그릇 속에 넣었다가 젖은 수건으로 깨끗이 닦은 후, 다시 참기름 속에 넣어두었다. 참기름이 다 스며 들고나면 그것을 작은 헝겊주머니 속에 있는 "목갑" 속에 넣고 잘 밀봉했다. 이후 길일을 택하여 수술 받은 내시의 사랑에 모시는데, 반드시 대들보 위에 놓는다. 그러다 그 내시가 죽으면 대들보 위에서 그 목갑을 내려 죽은 내시의 육신에 원래대로 바늘로 기워 맸다. 이는 죽은 내시가 온전한 남자가 되어 九重天(하늘나라)에 가서는 떳떳한 신분으로 조상님을 만나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조선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2 > 다할미디어 출판사 , 이우상 글에서 발췌.
또한 '초안산 조선시대 분묘군’(사적 440호)에서 정5품 상궁 벼슬을 지낸 궁녀 묘비가 발견됐다. 내시·궁녀 연구가인 국사편찬위원회 서울시 사료조사위원 박상진씨는 월계동 초안아파트 뒤편 초안산 자락에서 영조 때 상궁을 지낸 상궁개성박씨 묘비가 머릿돌이 잘린 채 쓰러져 방치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박씨는 또 월계로 맞은편 163번 버스 종점 인근 산자락에서도 또 다른 상궁박씨의 묘비를 찾아냈다. 이 중 상궁개성박씨 묘비는 머릿돌을 합치면 높이 약 121㎝, 폭 48㎝, 두께 12㎝인 비신 앞면에 한문으로 ‘조선국상궁개성박씨묘’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다. 뒷면과 오른쪽 측면에는 “성품이 단정하고 지혜로웠으며, 충심으로 윗전을 받들었고 사랑으로써 아랫사람을 대했다”고 그의 생애를 묘사했다. 가의대부 김국표가 지은 비문에 의하면, 박 상궁은 1706년(숙종 32)에 태어나 1726년(영조 2)에 궁녀로 선발돼 대궐에 들어갔으며, 1740년(영조 16) 봄에 궁녀 최고위직인 정5품 상궁에 제수됐다.
(세계일보 김지희 기자 kimpossible@segye.com )
최근 노원구청의 의뢰를 받아 초안산 내시·궁녀에 대한 학술조사(단장 이원명 서울여대 박물관장)를 벌이는 과정에서 박씨가 정확한 입비 연대를 찾아냈다. 높이 111㎝, 폭 42㎝, 두께 16㎝인 비신 앞면에 해서체로 ‘상궁박씨지묘(尙宮朴氏之墓)’가, 뒷면에 ‘만력이십칠년기해오월일립(萬曆二十七年己亥五月日立)’이라 각각 새겨져 있다. 박씨는 “만력 27년은 1599년(선조 32)으로, 현존하는 궁녀 묘비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세워진 것”이라고 밝혔다.
집 근처에 있는 초안산은 조선왕실의 비밀을 무덤까지 안고 간 이들이 잠들어 있다.